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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연 | 수심 27미터

 

 

  "제 얼굴 보실 날도 오늘이 마지막이잖아요. 자꾸 그렇게 나오실 겁니까?"

 


  턱을 괴고 있던 칼리안이 애교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스물을 훨씬 넘긴 청년이었지만 홍옥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뜰 때면 칼리안은 앳된 소년 같은 인상이 되곤 했다. 그러나 미인계도 통하는 상대가 따로 있기 마련이었다. 플란츠는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말 좀."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지금 형님 표정을 보면 가서 통신 한 번 안 걸어주실 것 같습니다."

 


  스물일곱을 맞이한 국왕의 탄신기념일 행사는 이번 해에도 성대했지만 정작 그 주인공인 칼리안은 남의 행사인 것처럼 뜨뜻미지근하게 굴었다. 아르피아 궁의 반응이 그러니 대신 수도에 있는 유일한 왕족인 플란츠가 혹독하게 갈려나간 건 자연한 일이었다. 이러다가는 플란츠가 고양이 두 마리만 챙겨 사직서를 던지고 떠날지도 모를 지경이 되자, 결국 칼리안은 궁여지책으로 고생한 형님에게 포상 휴가를 제시했다. 행사 관련 업무를 모두 마무리한 플란츠는 바로 다음 날 리리에가 있는 지그프리드 공작령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아우님이야말로. 매번 콩 타령을 하더니 본인이 삶아지기라도 하셨는지."

 


  날카로운 지적에 덩달아 콩이 되어버린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보였나요."

  "여전히 비밀은 못 지켜." 
  "형님에게만 들킨 겁니다. 딱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얀이나 키리에도 몰랐는걸요."

 


  칼리안이 순순히 시인했다. 그는 베른이자 칼리안이었으며, 또 ‘칼리안’인 자신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면서도 안정된 궤도에 올랐다. 매해 팔월이면 맞이해온 생일이 짧고 옅은 고민거리가 될 수는 있어도 아르피아의 업무를 마비시키고 플란츠를 고생시킬 화제까지는 못 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생일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이 검은콩을 삶아버렸는지. 늘 영민한 머리가 문제의 원인을 찾고자 팽팽 돌아갔다.

 


  "별것 아닙니다. 그저, 나이가 쌓일수록 상념만 많아진 탓에."

 


  그 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미리 나서서 말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자란 형제들이 어른이 되어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은 카이리스 왕궁이 아니더라도 어느 집에서나 있는 일이었다. 지금이 창문으로 한 층 사이 방을 서로 오가던 사춘기 소년 시절도 아니고, 사소한 고민을 전부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기에는 다소 면구스럽지 않나.

 


  "내 전하를 근심케 했는데, 어찌."
  "……그렇습니까."

 


  그러나 플란츠가 이리 물어온다면 회피해서는 안 되었다. 그는 칼리안이었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는 플란츠였기에. 그동안 서로 엇갈리고 교차한 끝에 맞물리고, 약속한 것들이 있기에.

 


  "아무것도 잊지 못하는 삶은 어떻습니까?"

 


  하여 칼리안이 물었다. 인세를 까마득히 초월한 자들에게만 허용되었던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권능을 타고난 유일한 인간에게 지혜를 구했다.

 


  "……너."
  "형님처럼 기억력이 좋지는 못해서 말입니다. 많은 것들이 퇴색되어가는 것만 같더군요."

 


  플란츠의 탄식에 칼리안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들의 시간은 범인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흘렀다. 그들은 지워진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거나, 그 속의 삶을 떠올리거나, 혹은 그 시간을 직접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십 년이란 기간이 수차례 쌓이고 무너지기를 반복해왔다. 그렇게 전쟁과 멸망을 막고 평화롭게 왕이 된 칼리안 루 레인 카이리스는, 여태 제가 몇 해를 살아왔느냐는 자문에 쉬이 답을 내릴 수가 없는 처지였다.

 

  그런 굴곡 속에서 칼리안에게 쌓인 기억은 보통의 스물일곱이 갖는 것보다 훨씬 많았다. 그는 스물여섯의 베른 세크리티아로 죽었고, 열넷의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가 되었으며, 또 그렇게 스물일곱의 칼리안 루 레인 카이리스로 자라났다. 하나도 잃을 수 없어 악착같이 그러모은 삶들이었으나 망각은 눈앞의 완두콩 같은 예외가 아닌 이상 누구나 안고 사는 숙명이었다. 칼리안에게는 갓난아기 시절 작고한 프레이야에 대한 기억도 일절 남아있지 않았으니. 그러니 이 또한 실로, 별 것 아닌 일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아서요. 어머니께서 저를 볼 때면 어떤 표정을 지어주셨는지."

 


  디에나 클로에, 칼리안이 플란츠와 세크리티아에 갔을 때는 이미 무덤에 묻힌 채였던 베른의 생모를 뜻하는 말이었다.

 

  며칠 전 얀의 부름에 카밀리아 궁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그 자리에서 붉은 석류 주스를 마시다가 제 망각을 알아차렸다. 당연하다고 하여 애석하지 않은 일이 되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이는 오로지 몇몇 이들의 기억과 앎으로만 존재하는 연이지 않던가. 여러 번의 진혼과 치유를 반복했다지만 아예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던 삶이라, 칼리안은 별 수 없이 조금 잠겨들었다. 기나긴 생 중 처음으로 맞이한 스물일곱의 날이었다.

 


  "그래서 그랬답니다. 그게 다예요. 아, 그렇죠. 형님, 그러고 보니 지그프리드에 가시면……."

 


  어느새 찻물이 식어 있었다. 플란츠는 부자연스럽게 바뀐 화제를 지적하지 않고 차고 쓰기만 한 찻물을 들이켰다. 그러는 편이 좋겠다고 여겼는지, 플란츠는 티타임을 끝내고 작별 인사를 할 때까지도 칼리안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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